선민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 성경의 언약 앞에서 바라본 오늘의 이스라엘
선택받았다는 말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라면,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면서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대교 전통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선택받은 백성’의 개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 더 우월하다.”
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유대교 내부의 오랜 해석과도 맞지 않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선택을 특권만이 아니라 더 큰 의무와 책임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정의와 거룩함을 실천해야 하는 책임이 더 무겁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인가?”라는 질문보다 “선택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선택에 걸맞은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대 국가에 이 질문을 적용할 때는 종교와 민족, 정부와 국민을 구분하면서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전 세계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경과 언약의 전통을 자신의 역사적 뿌리로 이야기한다면, 그 전통이 요구하는 정의와 책임이라는 질문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1.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복이 아니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 복은 아브라함 개인의 성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언약에는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여러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방향이 들어 있습니다.
이 장면을 책임의 관점에서 읽으면 선택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선택은
“너만 복을 누려라.”
가 아니라
“네가 받은 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가게 하라.”
는 사명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도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불립니다.
제사장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기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렇다면 선민이라는 개념 역시 지배의 근거보다 사명의 언어에 가깝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높아지는 자리가 아니라 더 많이 요구받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2. 성경에서 선택은 면책특권이 아니라 더 큰 책임으로 나타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나 공동체가 항상 편안한 특권만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엄격한 책임을 요구받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아모스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죄를 묻겠다는 역설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한 관계에는 특별한 면책이 아니라 특별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니 무엇을 해도 괜찮다.”
는 논리는 성경의 예언자적 전통과 잘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정의로워야 하지 않는가?”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더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에게 더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성경의 예언자들이 반복해서 왕과 권력자를 비판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책임과 연결됩니다.
3. 종교적 선택과 현대 국가의 정치적 권리는 같은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교적 언약과 현대 국제정치의 법적 권리는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가 자신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이라고 믿는 것은 종교적 신앙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현대 국가가 영토를 통치하고 군사력을 사용하며 다른 주민의 권리와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는 국제법과 정치윤리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특별성을 현대 국가행동의 포괄적 정당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어떤 국가도
“우리에게 특별한 역사적 사명이 있다.”
라는 이유만으로 국제법과 보편적 윤리의 판단에서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고 팔레스타인의 정치세력과 무장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신념은 국가권력의 무제한적 권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4.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할 때 유대인 전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정부가 아닙니다.
전 세계 유대인은 이스라엘 정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국민 전체 역시 어느 한 정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내부에도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시민과 정치세력, 학자와 활동가가 존재합니다.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의 안보·점령·정착촌·가자전쟁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유대인은 원래 그렇다.”
는 식으로 민족 전체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비판을 넘어 집단적 편견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 다루려는 대상은 유대인이라는 민족 자체가 아닙니다.
종교적·역사적 정당성이 현대 국가권력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5.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오늘의 유대인 전체에게 책임지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유대민족 전체의 집단적 죄로 돌리는 해석입니다.
복음서에는 당시 일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고 처형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시에 사형을 승인하고 십자가형을 집행한 정치권력은 로마제국의 통치체제였습니다.
예수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 역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수천 년 뒤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민족이 예수를 죽였다.”
는 식으로 집단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고 싶다면 십자가 사건을 민족비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보다
예수가 가르친 정의·자비·평화·원수사랑이라는 기준을 오늘의 모든 권력에 비추어보는 편이 더 타당합니다.
6. 예수의 가르침 앞에서 민간인의 생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수의 가르침에서 반복되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의 특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억압받는 사람, 나그네, 어린아이와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질문은 비교적 단순해집니다.
이스라엘 어린이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생명도 똑같이 소중한가?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 역시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어린이와 민간인의 생명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이스라엘 민간인의 생명 역시 존중받아야 합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와 다른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공격에서는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의도적으로 공격받았고 사람들이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민간인 공격과 인질납치는 어떠한 정치적 목적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쪽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다른 쪽 민간인의 생명가치를 낮추는 근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민간인의 생명가치는 민족과 종교에 따라 달라질 수 없습니다.
7. 자위권을 주장하는 국가도 국제인도법의 적용 밖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 정부는 2023년 10월 7일 공격 이후 자국민을 보호하고 하마스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수행한다는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실제 안보위협을 겪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가볍게 볼 수는 없습니다.
국가에는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위권과 국제인도법 준수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전쟁 중에도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해야 하고, 군사행동에서 비례성과 예방조치를 고려해야 하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격은 금지됩니다.
이 원칙은 국가든 무장단체든 모든 교전당사자에게 적용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안보위협이 존재하는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그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보호와 국제법의 원칙이 충분히 지켜지고 있는가?”
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8. 가자의 민간인 피해는 종교적 논쟁 이전에 인간의 생명에 관한 문제다
가자지구에서는 2023년 이후 대규모 민간인 피해와 주거지·의료시설·기반시설 파괴, 반복적인 주민이동과 인도주의적 위기가 이어졌습니다.
유엔 인권기구와 조사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사행동의 일부가 국제인도법의 중대한 위반이나 전쟁범죄에 해당할 가능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이러한 국제기구의 판단과 이스라엘 정부의 반론은 법적·정치적으로 계속 논쟁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민간인 피해가 커질수록 군사력을 행사하는 측에는 더 무거운 설명책임과 보호의무가 요구됩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가진 힘이 개인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9.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정착촌 문제도 별개의 질문이 아니다
오늘의 논쟁은 가자지구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점령과 정착촌 문제는 오랜 국제적 쟁점입니다.
202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권고적 의견에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내 정책과 관행이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고, 새로운 정착활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 팔레스타인인의 자결권과 점령지에 대한 영구적 통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측과 일부 법률가들은 이 판단의 범위·안보맥락·절차적 전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왔습니다.
따라서 법적 쟁점을 단순한 한 문장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는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강한 국가가 더 약한 주민의 토지와 이동, 주거와 일상에 장기간 영향을 미칠 때 그 힘은 어떤 한계를 가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종교를 넘어 국가권력의 책임에 관한 문제입니다.
10. 선민의식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유대교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곧바로 위험한 사상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유대교 전통 안에서도 선택은 우월감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은 계명과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문제는 종교적 확신이 정치권력과 결합하면서
“우리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진다.”
라는 논리로 변할 때입니다.
이 문제는 유대교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우리는 구원받았다.”
는 신앙을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근거로 사용한다면 잘못입니다.
무슬림이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근거로 사용한다면 역시 문제가 됩니다.
모든 종교에서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더 낮추고 책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낮추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권력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11. 성경의 예언자들이 반복해서 비판했던 대상은 외부의 적만이 아니었다
성경의 예언자들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적만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내부의 왕과 지도자, 종교권력과 부유층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일.
뇌물로 재판을 굽게 만드는 일.
나그네와 약자를 압제하는 일.
종교의식을 지키면서도 정의를 외면하는 일을 꾸짖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성공만 기록하지 않습니다.
왕들의 잘못도 기록합니다.
백성의 타락도 기록합니다.
종교지도자의 위선도 기록합니다.
이것이 오히려 성경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옳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왜 정의를 행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합니다.
12. 정말 선택받았다고 믿는다면 더 높은 기준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선택받았다는 고백을 책임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더 높은 기준이 따라옵니다.
더 큰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 절제해야 합니다.
더 많은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면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조치를 해야 합니다.
더 큰 국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 큰 설명책임을 져야 합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박해와 추방, 차별과 학살을 경험한 공동체라면 타인의 고통과 두려움에도 더 민감해야 한다는 도덕적 기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을 비난하기 위한 논리가 아닙니다.
고통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윤리의 질문입니다.
13.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라는 확신은 성경 자체에서도 끊임없이 도전받는다
국가와 종교가 결합하면 위험한 문장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확신을 단순하게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이스라엘을 꾸짖습니다.
왕이 잘못하면 왕을 심판합니다.
성전이 있으니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확신도 예언자들은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니 우리의 행동은 옳다.”
라는 논리는 성경의 예언자적 전통과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계속해서 묻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그에 걸맞게 정의를 행하고 있는가?”
14. 동시에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도 같은 윤리와 법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정의의 원칙은 한쪽에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마스와 다른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고 사람을 인질로 붙잡은 행위 역시 국제법과 보편적 윤리의 기준에서 판단받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오랜 고통과 점령의 현실이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할 권리를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겪은 테러와 안보위협도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생명을 가볍게 다룰 권리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고통은 다른 사람에게 같은 고통을 가할 면허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폭력은 끝없이 서로를 정당화합니다.
15. 결국 핵심은 ‘누구 편인가?’보다 ‘어떤 기준을 적용할 것인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쉽게 편을 나눕니다.
이스라엘 편인가.
팔레스타인 편인가.
그러나 종교적·윤리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다를 수 있습니다.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를 반대하는가?
인질납치를 반대하는가?
국가권력이 민간인의 생명과 기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보는가?
점령과 영토취득도 국제법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보는가?
종교적 신념이 다른 민족의 기본적 권리를 약화시키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가?
이런 기준을 먼저 정하고 양쪽에 동일하게 적용한다면 논쟁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16.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선택받았을까요?
단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창세기의 흐름을 보면 그렇다고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은 다른 민족에게도 이어지는 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택’이라는 개념에는 처음부터 밖을 향하는 책임이 들어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선택받았는가?”
보다
“선택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가?”
입니다.
공포를 주는 존재인가.
화해를 만드는 존재인가.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책임을 감당하는 존재인가.
이 질문은 특정 국가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에게도 적용됩니다.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정치권력에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최종 결론 — 선택은 왕관이 아니라 책임이어야 한다
나는 ‘선민’이라는 말을 왕관으로 이해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왕관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언약을 책임의 관점에서 읽으면 선택은 오히려 더 무거운 짐에 가깝습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이 요구합니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절제를 요구합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말하는 사람에게 더 큰 정의와 자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도 질문은 단순한 찬성과 반대가 아니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보는 보호되어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간인은 보호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과 인질납치는 비판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으로 다시 물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생명도 동일하게 보호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군사력을 행사하는 국가도 국제인도법의 제한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점령과 정착촌 역시 국제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민족적 증오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생명·정의·법의 기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유대인 전체를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가 보여주는 희생과 용서, 약자를 향한 사랑을 오늘의 모든 권력에 비추어보는 편이 더 기독교적인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말을 특권의 언어로 사용하는 대신 책임의 언어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라는 뜻이 아니라 더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라는 부르심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기준 앞에서는 이스라엘 정부도 예외가 아니고 팔레스타인의 무장세력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종교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에게 질문을 던지는 양심으로 남으려면, 선민이라는 말은 왕관보다 책임에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 이 글은 성경의 ‘선택과 언약’을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 현대 국가권력과 윤리를 성찰한 글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은 유대교·유대인 전체 또는 이스라엘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현대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과 국가권력의 책임을 구분해 다룹니다. 또한 하마스와 기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민간인 공격·인질납치 역시 같은 국제법과 민간인 보호의 기준에서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국제법적 쟁점에는 국제기구의 판단과 당사국의 반론이 존재하므로 개별 형사책임이나 모든 법적 쟁점을 이 글에서 확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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