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일본 농산물 유통에서 배우는 한국 농업의 해법
농민이 가격을 통보받는 구조에서 가격협상에 참여하는 구조로
우리나라 농산물 유통을 이야기하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불만을 동시에 듣게 됩니다.
농민은 말합니다.
“농산물 가격은 낮은데 비료비와 인건비, 전기료와 농자재 가격은 계속 올라 남는 것이 없다.”
반대로 소비자는 말합니다.
“마트에 가면 농산물이 너무 비싸 장보기가 겁난다.”
농민은 싸게 팔았다고 하는데 소비자는 비싸게 샀다고 한다면 생산지에서 소비자의 식탁까지 오는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가장 먼저 나오는 대안은 이것입니다.
“중간 유통단계를 줄이면 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농산물에는 선별, 포장, 저장, 운송, 판매, 재고와 폐기 위험관리라는 기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간 유통단계를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대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유통단계가 몇 단계냐가 아닙니다.
누가 농산물을 모으고, 누가 품질과 규격을 관리하며, 누가 판매처를 찾아 가격을 협상하고, 팔리지 않은 농산물의 위험을 누가 부담하는가?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은 가격을 통보받는 사람인가, 아니면 가격과 거래조건을 협상하는 사람인가?
유럽과 일본의 농산물 유통을 살펴보면 한국 농업이 참고할 만한 공통된 방향이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입니다.
농민 한 사람의 농장 규모를 무조건 키우는 것보다 작은 농가들이 판매할 때 하나의 큰 조직처럼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1. 한국 농산물 유통문제를 단순히 ‘중간상이 많아서’라고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농산물 유통문제가 나오면 “한국은 중간상인이 많아 유통비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국가별 농산물 유통비용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품목과 조사연도가 다르고, 국토 면적과 운송거리, 임금, 포장방식, 대형마트 비중, 저장시설과 소매구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 농산물 유통의 핵심문제를 단순히 ‘몇 단계를 거쳤는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가격협상력, 판매처의 다양성, 산지조직의 전문성, 가격폭락 위험의 부담주체, 물류비와 폐기율 등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제가 농민의 입장에서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다음 질문입니다.
“농민에게 농산물을 팔 수 있는 출구가 몇 개나 있는가?”
판매처가 한 곳뿐이면 가격을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도매시장 한 곳에 대부분의 물량을 보내야 한다면 그날 형성되는 가격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계약판매, 공공급식, 로컬푸드, 온라인도매시장, 온라인 직거래와 가공 등 여러 판매경로가 있다면 농민의 선택권은 달라집니다.
유통개혁의 핵심은 단순히 중간상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농민에게 더 많은 시장과 더 강한 협상력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2. 유럽의 핵심은 ‘농장을 크게’보다 ‘판매조직을 크게’ 만드는 것이다
유럽연합에도 가족농과 중소규모 농가가 많습니다.
개별 농민 한 명이 대형 유통기업이나 식품기업과 거래하면 규모에서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농민들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생산자조직, Producer Organisation(PO)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EU에는 약 **2,909개의 공식 인정 생산자조직과 90개의 생산자조직연합(APO)**이 있습니다. 생산자조직은 공급을 모으고 공동가공·유통·판매·마케팅을 수행하며 품질관리와 물류, 생산비 절감 등을 통해 농민의 집단적 협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조직은 단순한 농민 친목모임이 아닙니다.
생산량과 출하시기를 조정하고, 품질과 규격을 맞추며, 공동으로 선별하고 포장합니다. 저장과 물류를 공동화하고 공동브랜드를 만들며 시장정보를 분석해 구매자와 가격·물량·납품조건을 협상합니다.
여기에서 한국 농업이 배울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생산의 규모화와 판매의 규모화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농민 한 명에게 농장 10만평을 만들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농가는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하되 판매할 때 여러 농가의 물량을 모으면 됩니다.
3. 딸기농가 100명이 모이면 무엇이 달라질까?
예를 들어 딸기농가 한 사람이 10톤을 생산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10톤을 가지고 대형마트나 식품기업 구매담당자와 장기계약을 협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100농가가 같은 생산기준과 품질규격으로 참여하면 1,000톤의 공급능력을 가진 조직이 됩니다.
그 순간 상황이 달라집니다.
연간 공급량을 예측할 수 있고 품질규격을 통일할 수 있으며, 농가별 출하시기를 조절해 장기간 물량을 공급할 수도 있습니다. 포장재와 농자재를 공동구매할 수 있고 여러 대형 구매자의 조건을 비교해 더 유리한 판매처와 계약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00명의 농민이 한 사람의 농장주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농장을 유지하면서 판매할 때만 하나의 기업처럼 움직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 소농 구조에서 특히 중요한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4. 유럽은 농민을 조직하면서 동시에 구매자의 불공정한 힘도 제한한다
농민을 조직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자조직이 아무리 커져도 구매자인 대형마트나 식품기업이 계약조건을 일방적으로 바꾸거나 판매되지 않은 상품의 손실과 판촉비를 공급자에게 모두 떠넘긴다면 농민의 협상력은 다시 약해집니다.
그래서 EU는 농식품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16개 유형의 불공정거래행위를 법으로 규율합니다.
이 가운데 10개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6개 행위는 공급자와 구매자가 사전에 명확하고 분명하게 합의했을 때에만 허용됩니다.
금지되는 대표적인 행위에는 부패하기 쉬운 농식품의 대금을 지나치게 늦게 지급하거나, 납품 직전에 주문을 취소하거나, 구매자가 계약조건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행위가 포함됩니다. 공급자의 책임이 아닌 손실을 공급자에게 넘기거나 거래상 보복을 하는 행위도 규제대상입니다.
반면 미판매 상품 반품, 진열·판촉·광고·마케팅 비용 부담 등은 공급자와 구매자가 사전에 명확하게 합의했을 때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 농업에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농민에게 경쟁력을 키우라고 요구하는 것과 구매기업의 과도한 거래상 우위를 통제하는 것은 함께 가야 합니다.
5. 농산물 계약에는 가격뿐 아니라 ‘위험을 누가 부담하는가’를 적어야 한다
농산물 계약에서 가격만 정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를 납품할 것인지, 품질과 크기는 어떤 기준인지, 언제 어디에 납품하는지, 대금은 언제 지급하는지를 정해야 합니다.
또 반품은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 판매되지 않은 상품의 폐기비는 누가 부담하는지, 운송 중 파손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할인행사와 판촉비는 누가 부담하는지도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농업에는 태풍, 냉해, 폭염, 집중호우와 병해충이 있기 때문에 자연재해로 생산량이 부족해졌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도 계약에 담을 필요가 있습니다.
농민에게 가장 위험한 거래는 이런 식입니다.
“일단 생산해서 납품하십시오. 가격과 판매조건은 그때 결정하겠습니다.”
파종과 정식, 시설투자와 인건비는 농민이 먼저 부담하는데 판매가격은 마지막까지 모른다면 모든 위험을 생산자가 부담하게 됩니다.
앞으로 농산물 계약판매는 가격 또는 가격결정방식, 물량, 품질, 정산과 위험분담을 생산 전에 최대한 명확하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6. 일본에서 배울 첫 번째 제도는 공동선별이다
일본 농업은 한국과 비교하기 좋은 부분이 많습니다.
소규모 가족농과 고령농이 많고 농협인 JA의 영향력이 크며, 도매시장과 지역 특산물 중심 유통도 발달했습니다.
일본 농협의 경제사업에서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여러 농가가 생산한 농산물을 모아 같은 기준으로 선별하고 하나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선별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의 농민이 사과를 생산하면 농가마다 사과의 크기와 색상, 당도, 숙도, 포장과 출하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구매자는 매주 일정한 규격의 상품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선별장에서 여러 농가의 사과를 크기, 무게, 색, 당도와 외관 상태 등에 따라 같은 기준으로 나눕니다.
그 결과 농민 100명의 상품이 소비시장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브랜드 상품으로 바뀝니다.
농가의 생산규모는 작아도 시장에서는 큰 공급자가 되는 것입니다.
7. 공동선별 다음에는 공동계산이 필요하다
공동선별만 하고 농가마다 그날의 판매가격을 따로 적용하면 출하일에 따른 가격위험이 그대로 남을 수 있습니다.
어제는 사과 가격이 높았는데 오늘 물량이 몰려 가격이 폭락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같은 품질의 사과를 생산했는데 어제 출하한 농가는 높은 가격을 받고 오늘 출하한 농가는 큰 손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완화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공동계산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공동판매한 대금을 모아 공동 선별·포장·운송 등에 들어간 비용을 정산하고, 참여농가의 물량과 품질기준에 따라 판매대금을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한국에서도 공선출하회 등을 중심으로 공동출하·공동선별·공동계산이 산지조직의 중요한 방식으로 활용돼 왔습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농협 경제사업 분석에서도 공선출하회를 농협과 농가 간 계약을 바탕으로 공동출하·공동선별·공동계산을 실천하는 조직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공동계산을 모든 농가에 똑같은 돈을 나눠주는 제도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품질등급과 당도, 계약물량 준수, 규격과 상품성 등을 반영한 가감산 기준을 두어야 좋은 품질을 생산한 농민이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공동판매의 힘과 개별농가의 품질경쟁을 함께 살리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8. 일본 도매시장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변화는 ‘경매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중앙도매시장의 청과 거래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변화가 있습니다.
농림수산성 자료에 따르면 중앙도매시장 청과물의 금액 기준 상대거래 비율은 1998년 **50.7%**에서 2020년 **91.5%**까지 증가했습니다. 반대로 경매·입찰 거래비율은 2020년 약 **8.5%**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일본은 경매를 없앴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경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대형마트, 외식업체, 식품가공기업처럼 일정한 물량과 규격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는 구매자가 늘어나면서 사전에 물량과 조건을 협의하는 상대거래가 크게 확대된 것입니다.
대형마트 입장에서는 다음 달에 딸기 몇 톤을 받을 수 있는지 미리 알아야 합니다.
농민도 얼마를 생산할지 결정하려면 어느 정도의 판매가격과 구매물량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거래를 모두 당일 경매에 맡기는 것은 생산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불확실성이 큽니다.
그래서 경매와 함께 정가·수의거래, 예약 상대거래, 계약재배와 장기공급계약이 발전하게 됩니다.
한국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모든 농산물을 수확한 뒤 그날 가격을 확인하는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해야 하는가?
9. 경매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격결정 방식을 경쟁시켜야 한다
경매에도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많은 물량을 짧은 시간에 처리하고 공개적인 경쟁을 통해 그날 시장가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매 자체를 없애자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여러 가격결정방식이 서로 경쟁하게 하면 됩니다.
어떤 품목은 경매가 효율적일 수 있고, 어떤 품목은 계약재배가 좋을 수 있습니다. 대형마트와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농가는 정가·수의방식이 적합할 수 있고, 산지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온라인도매시장이 유리한 품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농민에게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시장에 모든 물량을 맡겨야 한다면 그 시장이 제시하는 가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시장이 농민의 상품을 놓고 경쟁한다면 농민의 협상력은 달라집니다.
10. 일본의 지산지소와 직매장이 주는 교훈
일본에는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 안에서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정책이 오랫동안 추진돼 왔습니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지산지소를 지역에서 생산된 농림수산물을 해당 지역에서 소비하고, 직매장과 가공 등을 통해 지역농업과 지역경제를 연결하는 정책으로 설명합니다.
일본 농림수산성 자료를 보면 2024년 농산물 직매장의 연간 판매액은 약 1조879억엔 규모였습니다.
직매장은 단순히 농산물을 싸게 파는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역 농산물을 학교급식과 복지시설, 지역 식당과 관광, 가공산업 등과 연결하면 직매장은 지역먹거리 유통망의 한 축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로컬푸드 직매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로컬푸드가 마트 구석의 작은 농산물 코너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지역 농산물의 판매·예약·공공급식·온라인 주문·관광과 가공을 연결하는 지역 먹거리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11. 우리 딸기 스마트팜과 도화정원의 직거래 경험에서도 같은 답을 얻었다
우리 딸기 스마트팜과 도화정원에서도 도매시장에 출하하는 방식과 로컬푸드·지역 직거래를 함께 경험해왔습니다.
도매시장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일정한 양의 농산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고 농민이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생산자는 출하하기 전 최종 판매가격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로컬푸드와 직접거래에서는 우리가 농산물의 가격결정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품종과 수확시기, 맛과 보관방법을 직접 설명하고 소비자 반응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잘하면 다음 해 다시 주문하는 단골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거래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소포장을 해야 하고 주문과 재고를 관리해야 하며, 소비자 문의에 답해야 합니다. 배송 중 딸기가 물러지거나 복숭아가 눌리면 판매자가 해결해야 하고, 사진촬영과 온라인 홍보도 필요합니다.
즉 중간 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서 하던 일을 농민이 직접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하는 것도 정답이 아닙니다.
12. 같은 딸기라도 판매처를 나눠야 한다
제가 농산물을 판매한다면 한 가지 품목을 하나의 시장에 모두 보내기보다 품질과 용도에 따라 판매처를 나누겠습니다.
최고등급 딸기와 선물용 상품은 예약 직거래나 온라인 판매에 적합할 수 있습니다.
일반상품은 로컬푸드와 지역매장에 공급할 수 있고, 대량으로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는 물량은 농협·도매시장에 보낼 수 있습니다.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지만 식품으로 문제가 없는 딸기는 잼·퓨레·청·냉동 등 가공용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농장 방문이나 수확체험에 적합한 물량은 체험프로그램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 품목을 하나의 가격으로만 팔지 않아도 됩니다.
상품마다 가장 가치를 잘 인정받을 수 있는 시장을 찾아주는 것이 농산물 마케팅입니다.
13. 한국의 온라인도매시장은 왜 중요한가?
한국에서도 새로운 유통경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농수산물 온라인도매시장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026년 5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청과물 거래에서 산지와 소비지의 직거래·직배송 비율은 **2025년 1~4월 31.7%에서 2026년 같은 기간 52.3%**로 증가했습니다. 정부는 같은 분석에서 오프라인 도매시장과 비교해 온라인도매시장의 유통비용률이 11.1%포인트 낮았고 농가수취가는 5.1%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온라인도매시장의 중요한 특징은 농산물을 먼저 수도권의 도매시장으로 이동시킨 뒤 다시 지방으로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거래가 성사된 뒤 산지에서 실제 구매처로 직접 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류단계가 줄어들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해야 합니다.
‘온라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자동으로 유통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14. 온라인도매시장의 성공을 거래액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온라인도매시장의 거래액이 1조원, 2조원이 됐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농민에게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온라인도매시장에 참여하면서 실제 새로운 구매자가 늘었는가?
산지에서 소비지로 직접 배송되는 비율이 증가했는가?
농가수취가격은 실제로 개선됐는가?
물류비와 운송거리는 얼마나 줄었는가?
반품과 폐기율은 감소했는가?
기존 오프라인 거래를 단순히 온라인 화면으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경쟁이 만들어졌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정책의 최종 목표는 온라인 거래액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비용을 줄이고 그 효과가 농가수취가격과 소비자가격에 실제로 반영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15. APC도 이제 선별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농산물산지유통센터, 즉 APC는 지금까지 산지에서 농산물을 모아 선별하고 포장하고 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도 APC를 농산물의 상품화와 수집·저장·출하 등 산지유통의 핵심시설로 설명하며 스마트화를 통해 산지 규모화와 시장교섭력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해왔습니다.
앞으로 APC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한 기계식 선별장이 아니라 산지 판매본부가 되어야 합니다.
올해 어느 농가에서 딸기가 얼마나 생산될지 예측하고, 대형마트와 식품기업이 어떤 규격을 원하는지 조사하며, 온라인 판매데이터를 분석해야 합니다.
계약영업과 상품기획, 물류설계와 브랜드관리도 해야 합니다.
스마트 APC의 진정한 의미는 선별기에 센서를 붙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산지의 생산정보와 시장의 판매정보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16. 농민에게 최소 다섯 개 이상의 판매통로를 만들어주자
저는 앞으로 농민에게 한 가지 출하처만 알려주는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가와 품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판매통로를 함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도매시장은 대량물량을 빠르게 처리하고 공개적인 가격을 발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도매시장은 산지와 구매자를 연결하고 직배송을 확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농협·생산자조직의 계약판매는 대형마트·식품기업·외식기업과 물량과 규격, 가격결정방식을 사전에 협상하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로컬푸드와 공공급식은 지역의 소비자와 학교·복지시설·식당 등 안정적인 수요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농민 온라인 직거래는 스마트스토어와 자체 쇼핑몰, SNS 등을 활용해 고품질 상품과 선물용 상품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품성이 조금 떨어지는 농산물은 가공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농민에게 출구가 여러 개 있어야 특정 시장의 가격이 좋지 않을 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17. 농산물 100톤을 생산한다면 어떻게 분산할 수 있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 가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생산자조직이 농산물 100톤을 생산한다고 가정합니다.
30톤은 대형 유통기업과 계약판매하고, 20톤은 학교·공공급식처럼 일정한 수요처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15톤은 온라인도매시장, 15톤은 로컬푸드, 10톤은 고품질·선물용 온라인 직거래로 판매하고, 5톤 정도는 도매시장에서 가격을 발견하거나 잔여물량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5톤은 규격이나 모양은 다르지만 가공에 적합한 상품을 잼·즙·퓨레·냉동 등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율이 정답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딸기와 양파는 다르고 복숭아와 쌀도 다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한 시장에 모든 물량과 농가소득을 맡기지 말자.
투자에서 자산을 분산하듯 농산물 판매에서도 판로를 분산해 가격위험을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18. 작목반도 이제 재배기술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나라 농촌에는 이미 많은 작목반이 있습니다.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모여 재배기술과 병해충 정보를 공유합니다.
이 조직을 새롭게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작목반은 재배교육뿐 아니라 생산량을 사전에 조사하고, 출하규격을 정하며, 공동포장과 공동판매까지 수행하는 생산자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농민에게 또 새로운 조직을 만들라고 요구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작목반·농협·농업법인·조합공동사업법인 등을 실제 판매조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도 산지유통조직을 조직화·규모화·전문화해 거래교섭력과 농가경영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을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19. 농협을 ‘출하대행 조직’에서 ‘판매전문회사’로 바꿔야 한다
농협이 농민의 농산물을 모아 가락시장이나 다른 도매시장에 보내고 나온 가격을 농민에게 정산하는 역할만 한다면 앞으로의 유통환경에서는 부족합니다.
농협은 농민을 대신해 시장을 찾아야 합니다.
대형마트와 가격을 협상하고 학교급식과 외식업체에 영업하며 온라인도매시장과 로컬푸드, 온라인 직거래까지 연결해야 합니다.
포장재를 공동구매하고 물류비를 낮추며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해 농민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농산물을 출하해주는 농협”에서 “농산물을 팔아주는 농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농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대출상품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생산한 농산물을 안정적인 가격에 팔아줄 조직이 필요합니다.
20. 농협의 성적표도 바꿀 필요가 있다
농협의 경제사업을 평가할 때 단순히 전체 판매액만 보는 것은 부족합니다.
조합원 농산물 판매액이 얼마나 늘었는지, 농가수취가격이 개선됐는지, 계약판매와 공동계산 비중은 얼마나 되는지, 새로운 거래처를 몇 곳 만들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라인도매시장과 로컬푸드 판매성과, 폐기율과 물류비 개선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농민 한 사람당 실제 판매소득이 증가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농협이 매출 100억원을 올리는 것보다 그 결과 농민에게 실제 얼마가 더 돌아갔는가가 더 중요한 평가기준일 수 있습니다.
21. 판매조직에는 농업전문가뿐 아니라 ‘판매전문가’가 필요하다
농민에게 몇 시간의 마케팅 교육을 하고 “이제 직접 온라인에서 판매하십시오”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농민은 이미 생산 전문가입니다.
딸기농민은 딸기를 잘 키우고 복숭아농민은 좋은 복숭아를 생산해야 합니다.
그 옆에는 전문 MD와 온라인마케터, 브랜드 담당자, 계약영업 전문가, 물류전문가와 고객관리 담당자가 있어야 합니다.
대형 유통기업이 농민보다 강한 이유는 그 회사 사람들이 농사를 더 잘 지어서가 아닙니다.
판매와 물류, 데이터와 협상에 전문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산자조직도 판매전문가를 가져야 합니다.
22. 한국 농산물 유통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10가지
제가 유럽과 일본의 사례, 그리고 우리 농장에서 직접 판매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목반을 생산자조직으로 발전시킨다. 친목과 재배교육을 넘어 생산계획·품질관리·공동판매까지 담당하도록 한다.
농협을 판매전문조직으로 강화한다. 단순 출하대행이 아니라 계약영업·온라인판매·공공급식·외식시장까지 직접 판로를 개척한다.
공동선별과 공동계산을 확대한다. 같은 품질기준으로 상품을 만들고 출하일에 따른 가격위험을 줄인다.
공동계산에 품질보상을 결합한다. 품질과 당도, 약정물량 준수 등에 따라 가산·감산해 우수농가가 손해 보지 않게 한다.
경매·계약·정가·온라인 거래를 경쟁시킨다. 어느 한 거래방식만 정답으로 만들지 않는다.
APC를 산지 판매본부로 발전시킨다. 선별·포장뿐 아니라 생산예측·상품개발·시장분석·계약영업을 담당한다.
생산자조직에 판매전문가를 둔다. 농민에게 모든 판매업무를 떠넘기지 않는다.
농협의 성과를 농가수취가격과 신규 판로로 평가한다.
로컬푸드를 지역 먹거리 공급망으로 발전시킨다. 직매장에 학교급식·복지시설·식당·관광과 온라인 주문을 연결한다.
정책성과를 거래액이 아니라 농가소득과 유통효율로 평가한다. 농가수취율, 물류비, 폐기율, 소비자가격과 신규 구매자 증가를 함께 본다.
23. 우리 농산물 판매조직은 몇 점일까?
좋은 생산자조직인지 판단하고 싶다면 100점 체크표를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생산농가들이 다음 달 출하물량을 사전에 공유하고 있으면 10점, 품종과 품질규격을 통일했다면 10점, 공동선별시설과 담당자가 있다면 10점입니다.
품질을 반영한 공동계산 기준이 있으면 10점, 도매시장 이외의 계약판매처가 있다면 10점, 로컬푸드와 공공급식에 연결되어 있다면 10점을 줄 수 있습니다.
온라인 판매와 배송체계가 있으면 10점, 반품·폐기·판촉비의 부담주체를 계약서에 명확히 했다면 10점, 판매·물류·마케팅 전문인력이 있다면 10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농가수취가격과 실제 유통비용을 구성원에게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10점입니다.
총 100점입니다.
단순한 점수놀이가 아닙니다.
점수가 낮다면 우리가 재배기술만큼 판매시스템에 투자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24. 결국 한국 농업에 부족한 것은 생산기술만이 아니다
한국 농민의 생산기술이 유럽과 일본 농민보다 뒤떨어진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스마트팜의 환경제어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농민들의 재배기술 역시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문제는 농산물을 생산한 다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딸기를 생산해도 판매하는 날 시장에 물량이 몰리면 가격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좋은 복숭아를 생산했는데 판매처가 한 곳뿐이면 그 시장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 농업정책의 질문도 바뀌어야 합니다.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더 잘 팔 것인가?”로 확장해야 합니다.
결론 ― 작은 농민도 시장 앞에서는 큰 판매자가 되어야 한다
유럽 농민이 한국 농민보다 모두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기 때문에 가격협상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EU는 생산자조직을 통해 농민들의 물량을 모으고 공동가공·판매와 가격협상을 지원합니다. 2024년 기준 EU에는 약 2,909개의 공식 인정 생산자조직과 90개의 생산자조직연합이 존재합니다.
동시에 대형 구매자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변경하거나 손실과 비용을 공급자에게 떠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 16개 유형의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공동선별과 공동판매가 발달했고, 중앙도매시장 청과거래에서도 상대거래의 비중이 크게 확대됐습니다. 2020년 금액기준 상대거래가 91.5%, 경매·입찰이 8.5%였다는 자료는 경매만으로 농산물을 거래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한국에도 필요한 조직은 이미 상당수 있습니다.
농협이 있고 작목반이 있으며 APC와 조합공동사업법인이 있습니다.
가락시장을 비롯한 공영도매시장과 로컬푸드가 있고 농수산물 온라인도매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있는 조직들이 ‘생산을 돕는 조직’에서 ‘농산물을 잘 팔고 가격을 협상하는 조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농산물은 수확했다고 완성되는 상품이 아닙니다.
소비자가 값을 지불하고, 유통에 필요한 정당한 비용을 제외한 적정한 몫이 생산자에게 돌아갈 때 비로소 농사가 하나의 사업으로 완성됩니다.
앞으로 농업의 순서도 바뀌어야 합니다.
소비시장 조사 → 판매처 확보 → 가격·물량 협상 → 생산계획 → 재배 → 공동선별 → 공동판매 → 여러 시장 가운데 유리한 거래 선택 → 농가소득
지금까지는 농사를 먼저 짓고 어디에 팔지를 나중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팔 곳을 먼저 찾고 필요한 물량과 품질을 알고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조금씩 이동해야 합니다.
농민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생산하십시오”라는 말만이 아닙니다.
잘 만든 농산물을 제값에 팔아주는 조직, 여러 판매처를 찾아주는 조직, 가격을 협상하는 조직, 가격폭락의 위험을 함께 나누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진농업의 핵심은 모든 농민을 거대한 농장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농민들이 시장 앞에서는 하나의 큰 판매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유럽의 생산자조직, 일본의 공동선별·공동판매 경험, 한국의 농협망·APC·로컬푸드·온라인도매시장과 온라인 기술을 우리 현실에 맞게 결합한다면 가격을 기다리는 농업에서 가격을 협상하는 농업으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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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셨다면 제 블로그의 **「가락시장 경매제, 이대로 좋은가? ― 농민의 생산비도 노동비도 묻지 않는 가격결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를 함께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이번 글이 유럽과 일본의 유통구조에서 대안을 찾았다면, 가락시장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경매 중심 가격결정 구조가 어떤 장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봤습니다.
다음으로 **「로컬푸드는 농민의 소득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까? ― 가격결정권을 되찾는 로컬푸드와 판매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생산자가 가격을 결정하는 로컬푸드가 어떻게 공동수거·온라인 예약·공공급식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를 다룬 글입니다.
또한 **「농민이 쿠팡·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 직접 농산물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서는 선별·포장·택배·온라인 마케팅·재구매까지 농민 직거래의 실제 운영방법을 정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산물 온라인 직거래, 농민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를 함께 읽으면 CSA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 스마트농업과 체험농업을 연결해 단순한 상품판매를 넘어 장기적인 소비자 관계를 만드는 방법까지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네 글을 가락시장 경매제 → 유럽·일본 유통사례 → 로컬푸드 → 온라인 직거래 순서로 읽으면 제가 생각하는 농산물 유통개혁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 이 글은 2026년 9월 현재 확인 가능한 EU 집행위원회, 일본 농림수산성, 농림축산식품부 등 공식자료와 농장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농산물 유통구조를 설명한 정보성·제안형 글입니다. 국가별 통계는 조사연도와 조사범위가 서로 다르므로 단순한 국가순위나 우열 비교보다는 제도의 작동방식과 한국 농업에 주는 시사점을 중심으로 보시는 것이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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