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 단순 집하장을 넘어 농민의 ‘판매본부’가 되어야 한다
농협 간 B2B·온라인도매시장·스마트 APC를 연결해 ‘생산하고 파는 농업’에서 ‘주문받고 생산하는 농업’으로
우리 농업의 오래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생산은 농민이 하지만 정작 가격을 협상하고 판매처를 선택하는 힘은 생산자에게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농민은 좋은 농산물을 만들기 위해 몇 달 동안 종묘비와 농자재비, 전기료와 인건비를 부담합니다. 그런데 수확기가 되면 다시 걱정이 시작됩니다.
“어디에 팔아야 할까?”
“오늘 도매시장 가격은 얼마일까?”
“이번 주 물량이 많이 나오면 또 가격이 떨어지는 것 아닐까?”
농민이 생산뿐 아니라 판매까지 혼자 걱정해야 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오래전부터 운영돼 온 산지유통의 핵심시설이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입니다.
APC는 단순히 농산물을 쌓아놓는 집하장이 아닙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APC를 농산물의 선별·포장 등 상품화와 수집·저장·출하 등 물류기능을 수행하는 산지유통시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APC는 여기에 자동화 장비와 데이터 기반 품질관리 기능을 더해 산지 유통의 효율성과 교섭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APC가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PC는 농산물을 모아 선별하는 장소에서 끝나지 말고, 주문을 모으고 구매처를 찾아 가격을 협상하는 농민의 공동 판매본부가 되어야 합니다.
1. APC는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 곳일까?
APC의 기본 기능을 농산물이 이동하는 순서대로 보면 농가 생산 → 수집·입고 → 선별 → 등급·규격화 → 포장 → 저장 → 물류 → 출하·판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러 농가의 농산물을 한곳으로 모읍니다.
딸기농가 한 사람이 300kg의 물량을 가지고 대형마트와 직접 가격협상을 하기는 어렵지만 100농가의 상품이 모여 30톤이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형 구매자는 일정한 물량과 규격, 납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APC는 작은 농가를 없애는 시설이 아니라 작은 농가들이 판매할 때 하나의 큰 공급자처럼 움직이게 만드는 시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선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규격화’다
여러 농가에서 농산물을 모았다고 바로 B2B 거래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상품규격이 같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딸기라면 ‘설향 500g 특품’, ‘설향 500g 상품’, ‘소포장 프리미엄’, ‘카페·제과용’, ‘급식용’, ‘냉동·가공용’ 등 구매자가 상품명과 규격만 보고 주문할 수 있을 정도로 표준화해야 합니다.
농식품부가 추진하는 스마트 APC도 자동 선별장비와 데이터 활용을 통해 보다 정밀한 선별과 품질관리를 강화하는 방향입니다. 2026년 8월 28일 농식품부는 현재 115개인 스마트 APC를 2030년까지 300개소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다시 밝혔습니다.
스마트 APC의 진짜 가치는 사람을 기계로 바꾸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어떤 농가에서 어떤 품질의 농산물이 얼마나 들어왔고, 어떤 규격으로 판매됐으며, 어느 시장에서 얼마에 팔렸는지를 데이터로 연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3. 포장도 ‘박스에 담는 작업’에서 상품개발로 바뀌어야 한다
대형마트가 원하는 상품과 학교급식이 원하는 상품은 다릅니다.
편의점과 온라인몰, 카페와 제과점, 식품기업이 필요로 하는 규격도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APC에서는 단순히 같은 농산물을 상자 크기만 바꿔 담을 것이 아니라 구매처별 상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같은 딸기라도 선물용, 1~2인 가구용 소포장, 카페·베이커리용, 급식용, 냉동가공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농산물은 하나의 원물이 아니라 여러 시장에 맞는 여러 상품이 됩니다.
APC의 경쟁력도 선별속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한 품목으로 얼마나 많은 판매처를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4. 저장시설은 단순 보관창고가 아니라 가격 대응수단이다
농산물은 수확했기 때문에 무조건 그날 팔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쉽습니다.
특히 저장성이 낮은 농산물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냉과 저온저장, 품목에 맞는 저장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면 품질을 유지하면서 출하시기를 조정할 여지가 생깁니다.
물론 저장한다고 가격이 반드시 상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장비용이 발생하고 품목별 저장가능 기간도 다릅니다.
하지만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판매시점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생산자의 협상력을 높이는 요소가 됩니다.
따라서 APC의 저온저장고는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판매시점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유통수단으로 봐야 합니다.
5. 그런데 왜 일부 농민에게 APC는 여전히 ‘집하장’처럼 느껴질까?
문제는 APC 건물 자체보다 판매역량의 차이입니다.
어떤 APC는 농산물을 모아 선별하고 저장한 뒤 대형마트와 편의점, 온라인몰 등에 직접 판매합니다.
반면 어떤 곳은 농산물을 받아 선별·포장한 뒤 기존 거래처나 도매시장에 보내는 역할에 크게 머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선별시설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강한 판매조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선별기가 비싸고 저온저장고가 커도 새로운 구매처가 없다면 결국 농산물이 향하는 곳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마트 APC의 ‘스마트’는 기계만 스마트해서는 안 됩니다.
판매도 스마트해야 합니다.
6. 이미 좋은 사례가 있다 ― 만인산농협 스마트 APC
충남 금산의 만인산농협 사례는 앞으로 APC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농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만인산농협은 전국 30여 개 농협 등과 협력해 사전 주문에 따라 조합원 등이 생산한 100여 종류의 채소를 APC에서 상품화하고 대형유통업체와 온라인 등에 직접 출하하는 사업구조를 구축해왔습니다. 2022년 자료에서는 전국 31개 농협과 협력해 약 130개 품목을 620여 개 상품으로 선별·포장한다고 소개됐습니다.
또한 스마트 APC 구축 이후 2017년과 비교해 2023년 사업규모는 265% 확대되고 생산성은 96% 증가했습니다. 대형마트, 편의점, 온라인쇼핑몰 등 다양한 소비지 유통업체와 직접거래하는 사례로 농식품부가 소개했습니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자동선별기 자체가 아닙니다.
다른 농협의 농산물까지 연결하고 소비지 주문을 받아 상품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농협 간 B2B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7. 전국 APC가 하나의 농산물 B2B망으로 연결된다면?
예를 들어 홍천의 APC에는 딸기와 복숭아, 찰옥수수가 있고 전남의 다른 APC에는 양파와 마늘, 배가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제주 APC에는 감귤과 월동무가 있습니다.
서울의 한 식자재업체가 딸기 3톤, 양파 20톤, 감귤 10톤, 배 5톤을 한꺼번에 필요로 합니다.
지금까지는 구매담당자가 각 지역의 농협과 산지업체를 개별적으로 찾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국 APC의 재고와 출하가능량, 상품규격이 하나의 시스템에서 보인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구매주문 접수 → 전국 APC 재고조회 → 산지별 공급물량 배정 → 가격·납기 협의 → 공동물류 → 구매처 납품
이런 구조가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농협 간 B2B’**입니다.
8. APC는 ‘농산물 종합상사’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APC는 역할을 세 단계로 확장해야 합니다.
기존 APC가 농산물을 수집했다면 앞으로는 농가와 생산계획을 조직해야 합니다.
기존 APC가 농산물을 선별·포장했다면 앞으로는 구매처별 상품을 개발하고 품질규격을 표준화해야 합니다.
기존 APC가 농산물을 출하했다면 앞으로는 대형마트·식품기업·급식업체·온라인몰·수출업체와 직접 계약하고 가격을 협상해야 합니다.
즉 APC가 관리해야 하는 정보도 단순 입고·출고 기록에서 생산예측·재고·가격·소비지 주문·판매속도·클레임·시장수요 데이터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것입니다.
“농민이 생산한 뒤 팔 곳을 찾는 구조”에서 “판매처와 주문을 확보한 뒤 생산계획을 세우는 구조”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9. 정부의 온라인도매시장 정책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 농식품부가 추진하는 농산물 유통정책에서도 이 방향은 확인됩니다.
정부는 온라인도매시장에서 거래가 체결된 뒤 산지에서 소비지로 직접 배송함으로써 기존 유통경로를 4단계에서 1~2단계로 단축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온라인도매시장의 거래비중을 2025년 도매유통의 약 6% 수준에서 2030년 50%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온라인도매시장 판매자로 참여하기 위해 필요했던 연간 거래규모 요건도 삭제됐습니다.
2025년 9월 관리운영위원회 결정에 따라 종전 연매출 20억원 이상이라는 판매자 가입요건을 없애 소규모 농업법인과 유통주체의 참여기회를 넓혔습니다.
즉 시장의 문이 이전보다 넓어지고 있습니다.
10. APC와 온라인도매시장이 연결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기존의 대표적인 유통경로 가운데 하나는 농가 → APC → 도매시장 → 중도매인 → 소매업체 → 소비자였습니다.
앞으로는 일부 물량이 농가 → APC → 온라인도매시장 → 대형마트·식자재업체·지역마트 등의 구매자로 직접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온라인도매시장은 상품 자체를 먼저 중앙도매시장으로 보내놓고 거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보와 거래를 먼저 온라인에서 체결한 뒤 물류를 움직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정부도 스마트 APC를 온라인도매시장의 핵심 산지 판매주체로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해왔습니다.
이 구조가 확대되면 APC는 단순히 도매시장으로 농산물을 보내는 출하기지가 아니라 여러 시장 가운데 조건을 비교해 선택하는 판매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11. 온라인도매시장도 거래액만 늘린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도매시장에서 거래액이 커지는 것은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농민에게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온라인 거래를 통해 새로운 구매자가 실제로 늘었는가?
산지에서 소비지로 직배송되는 비율이 증가했는가?
물류비가 줄었는가?
농가수취가격은 개선됐는가?
정산은 빨라졌는가?
반품과 클레임은 줄었는가?
기존 오프라인 거래를 화면만 온라인으로 옮긴 것인지, 새로운 경쟁과 판로가 만들어졌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따라서 APC와 온라인도매시장의 성과는 거래액뿐 아니라 농가수취가격과 유통비용, 새로운 구매처 증가로 평가해야 합니다.
12. 가장 중요한 것은 ‘물량’보다 ‘주문’을 모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산지조직화는 주로 생산자를 조직하고 물량을 모으는 데 집중해왔습니다.
물론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농민 1,000명을 조직해 농산물 1만톤을 모았는데 살 사람이 충분하지 않으면 가격은 떨어집니다.
따라서 생산자 조직화와 함께 구매자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APC가 확보해야 할 고객은 다양합니다.
대형마트와 SSM, 편의점, 호텔, 학교급식, 병원과 복지시설, 군납, 식자재회사, 식품제조기업, 온라인몰, 전문 온라인판매자와 수출업체 등이 모두 잠재적인 구매자입니다.
APC가 해야 할 일은 “농산물이 들어왔습니다. 어디에 팔까요?”가 아닙니다.
“다음 달 이 구매자가 이 규격의 상품을 이만큼 필요로 합니다. 어느 농가가 생산하시겠습니까?”라고 농민에게 제안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3. ‘생산 후 판매’에서 ‘주문 후 생산’으로 바꾸자
예를 들어 APC 영업팀이 대형 구매자와 협상해 다음 해 5~6월에 설향 딸기 500g 상품 80톤을 공급하는 계약을 확보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다음 산지 농가와 생산계획을 세웁니다.
어떤 품종을 어느 정도 면적에 심을지, 수확예상량은 얼마인지, 어떤 품질과 포장규격을 맞출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출하할지를 정합니다.
농민은 적어도 누가 구매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농사부터 짓지는 않게 됩니다.
물론 기상과 작황 때문에 실제 생산량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장수요를 알고 생산계획을 세우는 것과 수확한 뒤 판매처를 찾는 것은 경영위험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계약재배와 판매계획형 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14. APC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농산물을 파는 사람’이다
스마트 APC에는 자동선별장비를 운영하는 기술자도 필요합니다.
품질관리 담당자와 물류전문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매우 중요한 인력은 농산물을 팔 수 있는 사람입니다.
대형마트 MD와 가격·물량을 협상하고 식품회사와 연간 공급계약을 체결하며 온라인몰 상품을 기획하고, 다른 APC의 부족한 품목까지 조달해 구매처 요구를 맞출 수 있는 농산물 전문 MD와 B2B 영업인력이 필요합니다.
정부 정책에서도 거래중개인 육성과 디지털 유통전문인력, 소비지 맞춤형 상품개발과 품질관리 기능 강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설자동화와 사람의 전문성이 함께 가야 합니다.
자동선별기는 농산물을 등급별로 나눌 수 있지만 구매처를 찾아 전화하고 가격을 협상하지는 못합니다.
15. 정부도 2026년부터 농가와 온라인 전문셀러의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
이 부분도 이번 글과 연결되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농식품부의 유통구조 개선계획에는 2026년부터 농가와 온라인 전문셀러를 연결하는 판매지원 사업을 시범 추진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농가에는 온라인 셀러 정보와 유통컨설팅을 제공하고, 전문셀러에는 우수산지 정보와 일정 물류지원을 제공해 온라인 판매를 확대하는 방식입니다.
2026년에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도 온라인 마케터 육성사업 참여자를 별도로 모집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입니다.
모든 농민에게 “직접 스마트스토어를 만드십시오”라고 하는 것보다 농민은 생산하고 판매전문가는 판매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많은 농가에는 더 현실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 APC 평가기준도 시설과 매출 중심에서 농가성과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APC를 평가할 때 취급물량과 매출액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100억원어치를 판매했다고 해도 농민에게 돌아간 가격이 낮고 물류비가 많이 들었다면 농민 입장에서는 좋은 판매조직이라고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는 농가 평균수취가격, 주요 도매시장 가격 대비 실제 농가수취가격, 대형 소비처 직거래 비중, APC 간 B2B 거래액, 온라인도매시장 거래비중, 계약판매 비율, 농가 정산기간, 반품·클레임률, 물류비와 폐기율, 신규 구매처 수 같은 지표를 함께 봐야 합니다.
특히 제가 중요하게 보는 숫자는 이것입니다.
“이 APC 때문에 참여농가의 평균 판매소득이 얼마나 개선됐는가?”
이 질문이 APC 정책의 최종 성적표가 되어야 합니다.
17. 좋은 상품만 골라 팔고 나머지를 농민에게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농가소득을 높이려면 특품 판매가격만 높여서는 부족합니다.
전체 수확량 가운데 얼마를 돈으로 바꿀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딸기를 선별해 최상급은 프리미엄시장과 선물용, 일반 상품은 대형마트와 로컬푸드, 중소과와 혼합규격은 식자재와 온라인 실속상품, 외관은 떨어져도 먹는 데 문제가 없는 상품은 잼·퓨레·냉동·제과용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복숭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양이 예쁜 상품만 판매하고 나머지를 다시 농민에게 돌려보내는 구조보다 상품등급별로 다른 시장을 만들어주는 APC가 농민에게 훨씬 가치가 큽니다.
그래서 APC 주변의 전처리시설과 냉동·냉장시설, 가공시설이 중요합니다.
목표는 모든 농산물을 같은 가격에 파는 것이 아니라 각 품질에 맞는 가장 높은 부가가치의 출구를 찾는 것입니다.
18. 로컬푸드와 APC는 경쟁할 필요가 없다
로컬푸드와 APC, 농민의 온라인 직거래를 서로 경쟁하는 판매채널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상품과 물량에 따라 역할을 나누면 됩니다.
소량으로 자주 나오는 신선농산물은 지역 로컬푸드가 적합할 수 있습니다.
대량으로 규격화할 수 있는 농산물은 APC를 통한 B2B와 계약판매가 적합합니다.
프리미엄 선물상품은 농민 온라인 직거래가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가공용 농산물은 식품기업으로 보내면 됩니다.
이를 단순화하면 로컬푸드는 지역 소매, APC는 전국 B2B·도매, 온라인 직거래는 브랜드 소매라는 식으로 역할을 나눌 수 있습니다.
농협이 농민의 직접판매를 경쟁으로 볼 이유도 없습니다.
농협의 역할은 농민이 직접 갈 수 있는 시장을 막는 것이 아니라 농민 혼자서는 들어가기 어려운 더 큰 시장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19. 제가 제안하는 ‘APC 2.0’은 전국 공동 B2B망이다
여기부터는 현재 정부가 이미 전국 단일 시스템으로 완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제안입니다.
전국 스마트 APC가 같은 상품표준을 사용할 수 있다면 농협 간 거래가 훨씬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상품코드를 ‘홍천-설향딸기-특-500g-12팩’, ‘복숭아-백도-특-4.5kg’, ‘감자-수미-상-20kg’처럼 품종과 등급·포장단위까지 표준화합니다.
그러면 다른 지역 농협이나 구매자가 어느 APC에 어떤 상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역 농협 A가 고객 주문을 받았는데 자체 지역에 배가 없다면 나주나 다른 주산지 APC의 배를 구매해 고객에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강원지역 딸기가 부족할 때 다른 산지에서 조달할 수도 있습니다.
농협이 자기 관할에서 생산되는 상품만 팔 필요는 없습니다.
전국의 농협이 서로 상품을 사고팔며 하나의 거대한 농산물 공급망을 만드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농협 간 B2B의 최종 모습입니다.
20. 전국 300개 스마트 APC가 연결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2030년 정부계획대로 스마트 APC가 300개까지 확대됐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현재 정부는 2026년 8월 기준 115개에서 2030년 300개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아침에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홍천 딸기 출하가능 12톤, 논산 딸기 40톤, 나주 배 80톤, 제주 감귤 120톤, 의성 사과 90톤이 표시됩니다.
반대편에는 서울 A유통업체의 딸기 5톤 주문, 부산 B급식업체의 사과 10톤 주문, 대전 C식품회사의 배 20톤 주문이 올라옵니다.
시스템은 품종과 등급, 가격, 배송거리, 재고, 납품가능시간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실제 계약조건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협상하고, 거래가 성사되면 산지에서 구매처로 물류가 움직입니다.
모든 거래를 기계가 자동 결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가 전국적으로 연결된다면 구매자는 농산물을 찾아 헤맬 필요가 줄고, 농민의 상품은 훨씬 많은 구매자에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농산물 유통의 디지털 고속도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21. ‘APC 공동마케팅·B2B본부’도 검토할 만하다
각 지역 APC가 따로 서울과 수도권의 대형마트와 식품기업을 찾아다니면 영업역량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앙 또는 권역 단위에 APC 공동마케팅·B2B본부와 같은 판매전문조직을 두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이 조직은 농산물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대형 구매처 발굴, 대량공급계약, 상품기획, APC 간 물량조정, 가격협상, 온라인도매시장 판매, 수출과 물류조정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확보한 주문을 실제 생산능력과 품질조건에 맞춰 지역 APC에 배분합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농산물을 모아놓고 구매자를 찾는 방식”에서 “구매주문을 확보한 뒤 적합한 산지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현재 전국적으로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향후 검토할 수 있는 정책제안입니다.
22. 정부지원도 ‘시설지원’과 ‘거래지원’을 함께 봐야 한다
APC에 자동선별기와 저온저장고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건물과 장비만 지원해서는 판매조직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판매전문가 인건비, 상품표준화, 공동 B2B 시스템, 수요예측, 물류비와 공동배송, 계약판매, 신규 구매처 개척, 품질관리와 신속정산 같은 거래역량에 대한 투자도 중요합니다.
정부 역시 2030년 온라인도매시장 비중 50%, 스마트 APC 300개 확대, 온라인 거래 전용 물류망, 거래중개인 육성과 산지·소비지 연결 강화 등을 함께 추진하고 있습니다.
방향은 이미 보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정책을 따로 운영하지 않고 APC·온라인도매시장·전문셀러·농협·물류망을 하나의 판매체계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23. 미래 APC에는 네 개의 핵심 기능이 필요하다
제가 생각하는 미래형 APC에는 최소 네 가지 기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생산관리 기능은 농가 조직화, 계약재배, 작황과 예상수확량 관리, 출하계획을 담당합니다.
상품관리 기능은 공동선별과 품질관리, 포장규격과 신상품 개발을 맡습니다.
물류기능은 예냉·저장·재고관리·공동배송과 콜드체인을 관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판매·마케팅 기능이 농협 간 B2B, 온라인도매시장, 대형마트와 식자재기업, 온라인몰, 수출업체를 대상으로 실제 영업을 담당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앞의 세 기능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면 앞으로는 네 번째 기능인 판매능력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24. APC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APC가 몇 개 만들어졌는지가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동선별기를 몇 대 설치했는지도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농민의 입장에서 목표는 더 단순합니다.
“내가 생산할 농산물을 누가, 언제, 어느 규격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갈지 조금이라도 더 예측할 수 있는 농업.”
APC는 이 구조를 만들어주는 조직이어야 합니다.
생산한 다음에 가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장수요와 주문정보를 생산계획에 반영하고, 여러 판매처를 비교하며, 가능한 경우 사전에 물량과 가격결정방식을 협의하는 농업으로 가야 합니다.
결론 ― APC는 ‘농산물을 모으는 곳’에서 ‘주문을 모으는 곳’으로 진화해야 한다
농산물산지유통센터 APC는 원래부터 단순 집하장이 아닙니다.
농산물을 모으고 선별하며 규격화하고 포장하고 저장해 시장에 공급하는 산지유통의 핵심시설입니다.
정부도 이 기능을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2026년 8월 현재 스마트 APC는 115개이며 정부는 이를 2030년 300개소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온라인도매시장도 2030년 도매유통의 **50%**까지 활성화하는 목표가 제시돼 있고 판매자 가입의 연간 거래규모 요건도 삭제됐습니다.
2026년에는 농가와 온라인 전문셀러를 연결하는 판매지원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인산농협처럼 이미 다른 농협들과 협력해 다품목을 상품화하고 대형마트·편의점·온라인 시장으로 직접 판매하는 선도적인 APC 사례도 존재합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가야 합니다.
기존의 단순한 농가 → APC → 도매시장 경로에 더해 농가 → APC → 온라인도매시장 → 기업·유통업체, 농가 → APC → 다른 지역 농협·APC → 구매처, 농가 → APC → 온라인 전문판매자 → 소비자 같은 여러 경로가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면 APC는 단순한 선별장이 아니라 농민의 산지 종합상사, 농협 간 B2B 허브, 농민 공동의 영업본부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것입니다.
“농산물을 모아놓고 팔 곳을 찾는 APC에서, 주문과 구매처를 먼저 확보하고 농민에게 생산기회를 연결해주는 APC로 바꾸자.”
농민이 농사를 잘 짓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상품을 제값에 판매할 조직까지 갖춰질 때 농업경영은 훨씬 안정될 수 있습니다.
스마트 APC의 최종 목표도 자동선별기의 숫자가 아니라 농민이 시장과 가격결정 과정에 얼마나 더 가까이 참여하게 되었는가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것이 APC가 농민의 진정한 ‘판매본부’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이 글을 읽으셨다면 먼저 **「유럽·일본 농산물 유통에서 배우는 한국 농업의 해법 ― 농민이 가격을 통보받는 구조에서 가격협상에 참여하는 구조로」**를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유럽의 생산자조직과 일본의 공동선별·공동판매 사례를 통해 왜 작은 농가도 판매단계에서는 하나의 큰 조직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살펴본 글입니다.
다음으로 **「가락시장 경매제, 이대로 좋은가? ― 농민의 생산비도 노동비도 묻지 않는 가격결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를 함께 보면 좋습니다. 가락시장과 경매제가 가진 장점과 한계를 이해하면 APC·계약판매·온라인도매시장 같은 새로운 판로가 왜 함께 필요해지는지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컬푸드는 농민의 소득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까? ― 가격결정권을 되찾는 로컬푸드와 판매농협의 새로운 역할」**에서는 APC가 전국 단위 B2B를 담당한다면 지역의 소량 신선농산물은 로컬푸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다뤘습니다.
마지막으로 **「농민이 쿠팡·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 직접 농산물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도 연결해서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APC와 농협이 B2B 판매를 담당하고 농민의 온라인 직거래가 프리미엄·선물시장과 단골고객을 담당하는 멀티채널 유통전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글들을 가락시장 → 유럽·일본 유통사례 → APC → 로컬푸드 → 농민 온라인 직거래 순서로 읽으면 제가 생각하는 농산물 유통개혁의 전체 흐름을 보다 쉽게 볼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6년 9월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공개한 자료를 토대로 스마트 APC와 온라인도매시장 정책을 정리하고, 일부 내용은 필자가 생각하는 향후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방안을 제안한 글입니다. 스마트 APC 300개, 온라인도매시장 도매유통 비중 50% 등은 정부가 제시한 2030년 정책목표이지 현재 이미 달성된 수치가 아닙니다. ‘전국 APC 공동 B2B망’과 ‘APC 공동마케팅·B2B본부’ 역시 현재 전국적으로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향후 검토할 수 있는 정책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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